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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석(sbs3039)
포에라마라는 장르는(Poem + Drama)시를 형용동작이 있는 일인 시극으로 좀 더 즐길 거리가 있는 입체적 종합 예술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를 개척하고 시연한 시인으로는 포에라머 공혜경이 있다.


사랑하기  바빠 늙을 틈 없네. 포에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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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겨울 나그네
2024-03-17
조회수 : 56

겨울 나그네

 

권 혁 수

 

L이 보이지 않는다. 몇 주 째 전화도 없다.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일까?
오히려 L의 어머니가 내게 전화를 하셨다. L 좀 찾아달라고.

L의 어머니는 저지난해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딸과 함께 C시에서 살다가 말년에 고향인 Y시의 L네 집으로 이주해오셨다. 오셔서 여기저기 돌아보고는 주변 환경이 너무나 많이 변해 놀랐다며 세월이 무상하다했다. 당신네 과수원이 있던 자리에는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마을사람 모두가 목욕하고 빨래하던 그 개울물은 다 어디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미국보다 더 낯설다, .”

L은 초등학교 때 만난 친구다. 친구라기보다 내 인생의 멘토였다. 여름이면 강으로 나가 수영을 가르쳐주었고 겨울이면 산으로 가서 꿩이나 산토끼 잡는 요령도 가르쳐주었다.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길 찾는 방법과 나무 열매나 봄나물을 채취해서 생존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맥가이버처럼 나타나 고충을 해결해주기까지 했다. 한 예로 내가 C시의 고향집에 다니러간 날이었다. 골목에 세워둔 내 승용차 타이어를 동네 불량배들이 펑크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가 불쑥 나타나 차 트렁크에서 스페어타이어를 꺼내 교체해주었고 정비소까지 동행해서 안전하게 수리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특별한 초능력이나 예지력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C시의 00고등학교로 발령받던 날 마침 우리 고향집 앞을 지나다 나를 본 것이었다.

L은 자신과 가족에게도 충실했다. 일찍이 학교 교사 생활을 명퇴한 그는 Y시의 외곽 언덕에 하얀 2층집을 지어놓고 가족 모두 한집에 모여 살 수 있도록 했다. 조경은 물론 실내 장식도 현대적 감각에 맞춰 세련되게 꾸며놓아 엣지를 강조하는 어머니도 미국생활을 접고 귀향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축하한다는 의미로 나도 그의 집 정원에다 기념식수를 했다. 봄에 제일 먼저 꽃이 핀다는 매화나무를 한 그루 심어주었다.

그런 그가 벌써 몇 주째 도통 소식이 없다. 다른 모든 지인들과도 절연을 하였는지 깜깜 무소식이라 했다.어머니와 여동생들과 누나 심지어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까지 모두 버리고 잠적을 한 것 같았다. L의 어머니는 전화로 그가 어디에 가 있던지 건강하게만 잘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왜 그렇게 된 것일까? 왜 가족과 절연하고 나에게조차 연락을 끊은 것일까? 삶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 입산수도(入山修道)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고갱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남태평양 타이티 섬으로 떠난 것처럼 떠난 것인가?
아닐 것이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럴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작고한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교육자였고 내가 만나본 그의 아내나 어머니 역시 온화하고 다정한 어머니요 아내였다. 그리고 누나나 여동생, 아들과 딸들도 다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게 흠인 남편이요 아들이요 아빠였던 것이다.

 

어쨌든 L의 행적이 지인들에게 파편처럼 포착되고 있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그가 그동안 가리킨 제자들이 산지사방에 널려있어서 위치추적기보다도 더 자세하게 행적이 포착되었다. 가령 그가 어느 추어탕집에서 누구와 점심을 먹었다느니, 제주도에 놀러갔는데 어느 농장에서 누구와 귤을 까먹는 것을 보았다느니... 각종 제보가 그의 어머니에게 접수되긴 했다.

 

L이 만든 여인상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L은 비록 조각전에서 낙선한 작품이었지만 부숴버리기 아깝다며 여인상을 집 앞 정원에 전시해 놓았는데, 추상적인 작품이라 감상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내 눈엔 분명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있는 여인상이었다. 여인상은 오늘도 변함없이 그의 집 앞 정원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다못해 하루는 내가 L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공중전화로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는데도 받지 않는다. 일단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그때서야 뭐가 그렇게 바쁜지 숨 가쁜 목소리가 건너왔다. 내 귀에 들려오는 L의 사연은 실로 간단했다. 학교 선배가 농장을 새롭게 조성하는데 급히 도와달라고 해서 제주도에 와있다는 것이었다. ‘조만간 공사가 끝날 테니 구경하러 오라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어머니께 몇 번 말씀드렸는데... 치매신가? 네가 좀 보살펴드려라.” 하고 말을 맺는다.

 

나는 곧바로 L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아프신 데 없으세요?”
98세인 L의 어머니는 여전히 <걔가 착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야>라고 엉뚱하게 대꾸하신다.
오늘이라도 L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나도 그 집 아들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되새겨지는 봄이다.
어느새 꽃샘추위도 지났다. 매화나무 가지가 활짝 팔을 벌리고 있고 꽃눈이 발그레하게 L을 기다린다는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