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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석(sbs3039)
포에라마라는 장르는(Poem + Drama)시를 형용동작이 있는 일인 시극으로 좀 더 즐길 거리가 있는 입체적 종합 예술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를 개척하고 시연한 시인으로는 포에라머 공혜경이 있다.


사랑하기  바빠 늙을 틈 없네. 포에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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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리고 나/수필 권혁수
2024-01-31
조회수 : 130

가족 그리고 나

 

권 혁 수

 

어느 날 지하철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픔이 없는 가족은 없다. 행복한 가족도 없다. 다만 아픔을 안고 행복을 찾아 지하철을 탄 나만 있다.>

 

나는 어릴 때 동네친구 L네 가정이 부러웠었다. 아버지가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인자하고 세련된 분이었다. 23여 형제 모두가 다정해서 나는 거의 매일 꽃밭 같은 L네 집에 놀러가서 살다시피 했다. 그 집 마당 평상(平床)에서 함께 공부하고 한 식탁에서 밥도 먹고 1년 반 정도 그가 멀리 타지 학교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정답게 어울려 지냈다. 그 후에도 그의 가족들이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행복하게 지낼 때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네 가정은 나의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네 가정의 내면에 내가 모르는 깊은 고충이 있었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L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를 앓다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던 날, 문상을 가서 L에게 같은 또래의 배다른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창업은 쉬우나 수성은 어렵다.>라는 옛말이 있다.

<가정을 이루기는 쉬우나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로도 이해가 되는데, 요즘에는 그 말이<가정을 이루기 어렵고 포기하기는 쉽다>로 바뀌어야할 것 같다.

시대가 <핵가족>을 넘어 탈가족화하는 추세라 그렇다. 상당수의 적령기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고, 심지어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다고 하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따라서 손자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늘어나고 있고 추석과 설 차례와 제사문화가 사라지는가 하면 족보마저 완전 무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족 곧 가정이란, <부모, 자식, 부부, 입양 등 관계로 맺어져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기본적인 사회공동체>를 말한다. 하지만 요즘 직장이 멀리 떨어진 맞벌이나 자녀 유학 등 각종 사유로 한집에 모여 동고동락하며 생활하는 집이 얼마나 되는가 묻고 싶다.

또 한때는 <딸 둘을 낳으면 금메달, 딸 낳고 아들을 낳으면 은메달, 아들만 둘 낳으면 목매달>이란 개그가 유행했었다. 이제는 부모가 자식에게<하나만이라도 낳거나, 아니 그냥 결혼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호소를 한다고 한다.

 

우리 가정 역시 예외는 아니다. 딸과 아들에게 결혼과 출산문제에 대해 거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아니 못했다. 어쩌다 내가 그런 말을 꺼내려고 하면<다들 그렇대요>하고 아내는 나를 위로하듯 만류를 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도 어느새 탈가족화한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80% 그런 것 같다. 각자가 자기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아들과 딸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려 하지 않고 아내는 주방과 안방 그리고 거실에서 하루를 지낸다. 나는 회사에서 집에 돌아오면 나만의 공간이나 자리를 찾을 수 없다. 휴일에도 거실에서 서성거리다 노트북을 들고 동네 카페에 가서 동네 아주머니들 수다를 들어가며 보내기가 일쑤다.

하여 나는 언젠가 <아빠 사표를 내야겠다.>고 농담처럼 가족들을 향해 한 마디 던진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들이 <아파트 은행 빚 다 갚을 때까지는 안 된다>고 대거리를 해서 그만 두 손을 들었다. 그나마 경제적 하수인이랄까, 가장의 의무 역할 면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리라.

 

<가족의 소중함은 헤어져봐야 안다>고 누가 말했던가! 마치 고국을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처럼... 그렇다. 가족이 헤어진다는 것은 슬픈 경우도 있겠지만 소중한 체험인 경우도 많다. 다시 만나기 위해 더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서로 극복해야하는 일상적인 삶의 한 과정인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 가족도 그런 과정을 겪어야했다. 아이들은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녔고 나는 지방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느라 홀로 원룸에서 지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지방 사무실에서 금요일 오후에 서울 아파트로 돌아오다 그만 네비게이션 장애로 길을 덧들었다. 그날 나는 가로등도 없는 어느 어두운 시골길을 마냥 헤매다 다행히 사고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심혈을 기울여 안전운전을 했던 것이다.

그날의 풍경과 소회를 회상하며 졸시 한 편 그려본다.

 

<겨울가족>

 

눈밭에서 명상하는 나목

얼음장 등에 지고 엎드린 냇물

가시덤불 덮고 꿈꾸는 들꽃

너무 멀어 그리운 제비들

 

그래 그래

 

봄에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향기롭게

기억을 노래하고 또 기억하겠지

 

어제의 통증을 가슴 아래 수납하고

 

담연하게

 

하루 하루 더 가까워지는

내일을 고대하겠지

오늘을 인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