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

검색영역

서울문화재단 블로그 입니다

서봉석(sbs3039)
포에라마라는 장르는(Poem + Drama)시를 형용동작이 있는 일인 시극으로 좀 더 즐길 거리가 있는 입체적 종합 예술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를 개척하고 시연한 시인으로는 포에라머 공혜경이 있다.


사랑하기  바빠 늙을 틈 없네. 포에라마

블로그 상세 보기

모래시계 글. 권혁수
2024-01-02
조회수 : 162

모래시계

 

권 혁 수

 

최근에 유성의 한 호텔에서 오래 전에 고락을 함께했던 전 직장 동료들과 모임을 가졌다.

연말이라 한해를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송년회랄까, 조촐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방에 모여앉아 또 매년 떠들었던 옛날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온천탕 사우나에서 뜨끈하게 몸을 덥히는데 모래시계가 눈길을 끈다.

순간 <, 지금 떨고 있니?>란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19951월에 방영한 연속극 <모래시계>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치깡패인 최민수(박태수 역)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기 직전에 절친인 검사 박상원(강우석 역)에게 토해낸 한 마디 절규다. 이 한 마디는 당시에 폭풍처럼 유행했는데, 드라마의 암울했던 분위기를 명쾌하게 정리한 최민수다운 명대사였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기 전부터 모래시계를 하나 갖고 싶어 했었다. 어느 동네 목욕탕에나 사우나실에는 의례 모래시계가 비치되어있었는데, 누구나 다 알다시피 이는 주로 권투선수나 노인들이 땀을 낼 때 열기를 견디며 인내를 신장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이다. 당시의 나로선 땀을 낼 나이거나 정서가 아니었으므로 모래시계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래시계를 보면 어느 사막의 분위기랄까,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호리병 속 거인을 만날 것 같은 신비감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구입하려다보니 딱히 학습에 필요한 도구가 아닌데다 -주머니 사정상- 가격도 만만치 않아 선뜻 구입하지를 못했다.

그러다 훌쩍 세월이 흘러 흘러,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면 사우나실에 비치된 모래시계를 자연스럽게 뒤집어놓는 것이었다. 순간, 변화된 내 자신의 행동이 놀랍고 우스꽝스럽고 측은하기까지 했다. 대전의 호텔 온천장에서도 그랬다. 다른 노인들처럼 건강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래시계를 바라보며 사우나의 열기를 견뎌냈던 것이다.

여하간 그렇게 땀을 빼고 나니 몸과 정신이 개운한 게 한 100살은 더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긴 했다.

 

아하, 그런데 마침 우리모임의 회장인 H선배가 우리가 하루 신세를 진 그 호텔 건물이 100년이 넘었다고 알려준다. 하여 새롭게 신축을 하기 위해 온천탕과 호텔 영업을 12월까지만 한단다. 그리고 바로 내년 초부터 시공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보니 그 호텔의 존재가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막다른 느낌이 들었다.

일순 그 호텔의 전환적인 신축계획처럼 내 인생도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을 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하는 각성도 덩달아 들었다.

 

<2023 만성질환 추계학술대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기대수명(건강수명)82.4세인데 남자는 79.3세고 여자는 85.4세라 한다.

나로선 100살은커녕 아직 칠십도 안됐지만 이날 함께 사우나를 한 K선배가 나이 이십대 때는 20Km/h, 삼십대 때는 30Km/h로 달리는 거 같더니, 이제는 70Km/h로 달리는 것 같다!고 한 말씀 한다.

그 선배 역시 연륜 상 호텔의 경우처럼 모래시계가 빨리 내려가는 것 같은 속도감을 느끼고 있었던가보다.

 

가령 시각적으로 역삼각형인 모래시계가 5분짜리라고 할 때, 처음 1~2분 정도에서는 모래가 느리고 더디게 내려가 쌓이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4분 쯤 지나면서는 아주 빠르게 바닥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속도감이 은근히 공포스럽다. 사실은 모래는 일정하게 바닥으로 내려가 쌓일 뿐인데 말이다.

 

K선배의 그런 두려움처럼 <, 지금 떨고 있니?>란 대사는 무대공포증이나 사회공포증 같은 증상을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관찰되거나 수치심을 느낄 상황을 회피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공포장애인 것이다.

 

나 역시 한동안 무대공포증을 심히 겪은 적이 있었다.

그 드라마가 방영되고 한 10년 쯤 지난 어느 해인가, 서울 도봉도서관에서 열린 시회(詩會)에서 칼럼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던 것이다. 사회자가 내 이름을 호명하여 무대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 자기소개를 하고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막상 내용을 말하려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상태가 돼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머릿속에서 꺼내려 해도 도무지 꺼내지질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급당황하여 말을 못하고 멍하니 서있는데 학원가의 명강사였던 H시인이 자기도 그런 적이 있었다며 응원을 해주어 무난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컥, 숨이 막힌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의 시대를 극명하게 조명한 걸작 드라마 <모래시계>.

6.25 이후에 빚어진 유신, YH사건,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세 사람의 상반된 삶을 극화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런 군상들의 역동적인 삶이 오늘날의 경제발전과 문화 창달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다만, 수많은 국민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 역사적인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연출한 김종학PD가 그 이후,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실패하여 S시의 한 고시텔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래시계 드라마나 김PD의 경우를 생각하면 윤택하고 평범한 서민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렵고 값진 삶인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코로나 이후, 우리 국민의 해외여행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우리도 내년에는 회비를 좀 더 추렴하여 해외에서 다시 건강하게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모두 함께 어느 외국의 사우나실에 모여앉아 모래시계를 가슴에 품고 더운 땀을 흠뻑 쏟아낼 것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