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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 블로그 입니다

서봉석(sbs3039)
포에라마라는 장르는(Poem + Drama)시를 형용동작이 있는 일인 시극으로 좀 더 즐길 거리가 있는 입체적 종합 예술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를 개척하고 시연한 시인으로는 포에라머 공혜경이 있다.


시 사랑하기  바빠 늙을 틈 없네. 포에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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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속 사실 글.권혁수
2023-04-04
조회수 : 672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이 시(詩)는 김구 선생이 애송했다고 인터넷에 무수히 올라있는 서산 대사의 시(詩)다. 그러나 이 시는 조선 순조 때의 유학자 임연 이양연(臨淵 李亮淵)의 시로 그의 시집인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려 있고,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그의 이름으로 실려 있다.

필자도 서산 대사의 청허집(淸虛集)에 실린 선시(禪詩)와 김구 선생의 자서전(백범일지)을 면밀히 살펴보았지만 이 시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시를 김구 선생의 애송시로 알고 있고 서산 대사의 시로 고집하려는 것일까?
생각건대 서산 대사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조선의 백성을 구제한 역사적 공적과 독립군을 이끌고 구국에 헌신한 김구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일치시키고 흠모하려는데 있지 않나 싶다.

한편 한학자 안대회 교수(성균관대학교)는 이 시를 가리켜 “짧은 시에 촌철살인의 시상(詩想)을 멋지게 펼쳐내고 따뜻한 인간미와 깊은 사유를 잘 담아내는 이양연의 전형적인 시풍(詩風)을 보여준다.”고 인터넷상에서 피력하고 있다.

이 시가 ‘촌철살인의 시상’을 통한 맑고 고결한 선비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조선의 유학자(이양연)의 시라는 것이다. 

유학은 충(忠)과 효(孝)를 통한 역사성을 강조하는 종교다. 자식을 많이 낳아 조상의 대를 잇고 조상의 유지를 받들어 봉사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유학을 표상으로 한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볼 때에도 수험생의 신분검증을 위해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뿐 아니라 외할아버지의 관직과 이름까지 답안지에 써 넣어야 했던 것을 볼 때 역시 한 개인의 역사가 곧 국가의 역사와 무관치 않았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반면, 불교는 무아(無我) 무상(無想)을 추구하는 게 근본 교리이다. ‘무상’ 곧 모든 것은 변하고 ‘무아’ 곧 ‘나’라는 특정된 존재가 애당초 없으니 나의 근거인 조상과 ‘이정표’라 할 ‘역사’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하지만 현대에는 국립박물관이나 조계종의 역사박물관에 불교 유적과 유물이 상당수 국보로 지정·보관되어 있고, 불교역사 역시 종단에서 상세히 기록·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라는 구절의 역사적 성향의 의미를 살펴볼 때 이 시는 결코 서산 대사의 선시(禪詩)일 수가 없다 하겠다.

하지만 나는 인터넷상의 그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 드라마를 볼 때 작가가 역사의 감춰지거나 그늘진 부분을 상상하고 재편하여 흥미롭게 시청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각색하는 상식을 무수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학자들처럼 역사를 고증하고 분석해가며 골치 아프게 살 일도 아닌 것이다.

언젠가 프로바둑기사 조훈현 국수가 들려준 말이 생각난다. 

“프로기사는 죽기 살기로 피 튀기며 바둑을 두어야 하지만, 일반 애기가분들은 그냥 편안히 즐기면서 바둑을 두시기 바랍니다.” 

조 국수의 말처럼 드라마 작가는 밥을 굶어가며, 온갖 상상을 쥐어짜가며 밤새워 대본을 쓰고, 역사학자는 시문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고증하고 전고를 따져가며 분석하여 논문을 써야 하겠지만 일반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 편안한 휴식시간에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나름의 감성대로 작가의 드라마를 보고 학자의 논문을 흥미롭게 살펴보면 그만인 것이다. 

통증 어린 역사의 진실(眞實)은 그들 작가나 학자들 몫이고 진실을 각색한 사실(史實)의 즐거움은 우리 대중들의 몫인 것이다. 

무더운 말복(末伏)에 잠시, 그 옛날 어린 시절에 밟았던 고향의 하얀 ‘눈길’을 다시 걷는 느낌으로 서산 대사와 김구 선생의 업적과 호국정신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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