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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과 스모 글.권혁수
2023-04-04
조회수 : 548

[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씨름과 스모

M스토리 입력 2023.02.01 13:42 조회수 314  0 프린트
 
 
 










한국과 일본은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나라다. 유럽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러시아, 그리스와 튀르키예(터키)의 관계가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우리와 일본의 경우는 전후 배상문제와 위안부 및 병탐에 대한 사과 논란, 독도 지배와 일본 정객들의 신사참배 문제 등이 매년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또한 대륙붕 7광구 공동개발도 휴화산처럼 갈등이 숨어있어 앞날이 걱정된다. 이 지구상에 두 나라가 존재하는 한 이 문제들은 양국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언젠가는 원만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숙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갈등 없이 평화롭게 서로 윈윈(Win Win)하며 잘 살아갈 수는 없을까?

어느 날인가, 나는 우연히 서울 명동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쇼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말소리를 듣고서야 그들이 일본인들인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비로소 그들의 덧니가 눈에 보였고 옷 스타일과 화장법까지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 자신도 덧니박이고 또 옷 스타일도 유니크로 패션이다 보니 달리 구별한다는 게 사실상 무리였다. 

그 후 언젠가 이번엔 내가 일본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오사카에서 길을 덧들어서 어느 주택가 골목에서 잠깐 헤맨 적이 있었는데, 일본의 젊은 청년 하나가 마침 이륜차를 몰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순간 우리 동네 옆집 청년이 외출하려고 길을 나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공통된 것도 많지만 다들 알다시피 민속의상과 음식, 건축물 양식과 놀이문화 등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모양과 색깔과 향기가 다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네 민속씨름과 일본의 스모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알다시피 일본 씨름인 스모는 덩치가 산 같이 커다란 선수들이 두꺼비처럼 서로 맞붙어 순간적으로 상대선수를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는 시합이다. 반면 우리네 씨름은 체급별로 둥근 모래판 안에서 샅바를 붙잡고 상대를 넘기는 경기인데 선수가 본의 아니게 모래판 밖으로 -한쪽 발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심판은 다시 모래판 중앙으로 두 선수를 위치시켜 재 시합을 갖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언젠가 미국에서 우리 민속씨름대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힘이 세고 덩치가 큰 미국인이라도 일단 샅바를 붙잡고는 아주 작은 우리 선수들에게 어림도 없이 넘어지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씨름은 우리의 힘과 혼이 담긴 국기인 것이 증명된 단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반면 스모는 요즘 몽골의 씨름(부흐)선수들이 대거 일본으로 진출해서 우승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나 스모에 담긴 정신적 내용을 볼 때 스모 역시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스모이자 국기인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도 멀지 않은 거리라 태고 적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따라서 다양하게 문화를 주고받았을 텐데, 어찌 이토록 확연히 다를 수 있을까? 나는 한동안 그 ‘다름’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설날이나 추석 때가 되면 예외 없이 TV에서 씨름대회를 방영하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도대체 왜, 다른 거야?>

마치 답이 없는 화두 명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처럼 문뜩 <지정학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발상에 촉이 꽂혔다.

일테면, 지정학적으로 일본은 섬나라인데 내 눈에는 그 지형이 마치 <배>의 형상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하여 인식 상 그들에게 있어서 섬을 떠난다는 것, 곧 배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바다에 빠져 생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과 같은 상상이 들었다. 따라서 스모 경기의 형태가 마치 적을 배에서 떨어뜨리는 <밀어내기> 공격방식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반면, 한국은 반도 형태로 마치 대륙에 <줄>을 매달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있어서 줄은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줄을 놓친다는 것은 곧 인생의 낙오나 실패를 의미한다. 하여 씨름도 <샅바>인 줄을 꽉 붙잡고 힘과 기술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생존방식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은 거의 통용되는 말이 아니지만 내 어린 시절엔 어른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나 취직을 하려고 할 때면 으레 <줄 댈 사람 있나 찾아보자>고 하던 말이 기억난다. 간혹 <빽 좀 써봐> 라는 말도 들었는데 이 역시 결국은 <뒷줄> 찾기와 연관된 말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일본에게 위안부 및 병탐 문제 등에 대해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허나 일본은 한사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사과>는 마치 패배를 자인하여 선상(船上) 밖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심각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닐까? 

반면 우리네 반도인이 <사과>를 요구하는 심정은 마치 지난 시절의 꼬인 줄을 깨끗이 풀어버리고 모래판 가운데로 다시 나가 정정당당하게 샅바를 붙잡고 재시합을 갖자는 <한풀이>식 의미는 아닐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평행선으로 달릴 수만은 없어서 그런지 최근 언론에 일제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으로 <일본의 우회사과에 무게를 둔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양국 정부가 꾸준히 긍정적 교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어차피 밉던 곱던 한국과 일본은 서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다. 과거지사로 인해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하더라도 공동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씨름과 스모처럼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배에서 떨어지지 않게 상대를 붙잡아주거나 또 줄을 놓치지 않도록 훈훈하게 배려하는 원만한 협력방식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여 해묵은 서가를 뒤적여보았더니 일찍이 일본의 문화선지자 야나기 무네요시(한국이름 유종열)가 저서 『한국과 그 예술』 「그의 한국 기행」에서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서로 신뢰하는 참된 평화는 종교적으로 깨닫고 서로 이해하는 길밖에는 달리 없다.>

<종교적으로 깨닫는다> 함은 무엇인가? 오늘부터 다시, 고민 아닌 고민, 명상 아닌 명상을 시작해야 할까보다.
M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