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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사람”: 공식적이면서 비공식적으로

등록일 2021-11-27 등록자 회원 이미지 김태윤 조회수 1,608

(대중음악)비평가의 항해술②_“인터넷 사람”: 공식적이면서 비공식적으로

 

편집자 주:

 

‘비평가의 항해술’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문화예술 정책과 대중음악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그리고 “최근의 관련 제도와 비평가들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두 가지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에 3개의 원고와 1개의 좌담회 기록이 업로드 되지만 이 물음들은 이미 이전부터 있어 왔고, 따로 또 같이하여 계속 고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바로 명확한 답을 내리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이곳 예술청 아고라에 하나의 주제로 제안하며 이와 관련한 공론이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전체 목차

① 비평가의 새로운 병참술: 지원사업을 활용하기_전대한

③ 그냥 모두 지원해주면 안 돼요? 지원사업 평가위원을 맡으며 생겼던 의문들_정구원

④ 종합 좌담회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 인터넷 사람)

 

 

인터넷 속에서 재단된 듯한 이 몸들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는 2012년부터 매 년마다 “인터넷에서 작업하고 있는 독립 예술가와 창작자들을 기념하는 실험적인 행사”인 XOXO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인터넷상에서 주로 활동 중인 작가, 디자이너, 영화 제작자, 음악가, 게임 제작자, 코더, 카투니스트, 등의 인물들이 “온라인에서 거주하고 노동하는 자신들의 이야기와 고생담을 공유하는”1) 장소입니다. 2016년, 닐 씨시레가(Neil Cicierega)라는 사람이 연단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닐 씨시레가입니다. 저는 기묘한 상황들에 의해서, 창작 경력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이 제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자꾸 말을 더듬게 되는데요, 저는 예술가이거나, 가끔씩은 코미디언이라고도 하고, 음악인이나, 영화 제작자기도 해요. 하지만 그 모든 단어들이 제가 거의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는 사실을 전달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냥 저 자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이미지와 비디오와 음악을 만들면서 하는 일들 말예요.” 1986년생인 씨시레가는 청소년기인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에서 활동했고, 어느 순간 그에게는 ‘창작 경력’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도 그는 그러한 식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실은 유튜브 영상의 제목은 “닐 씨시레가, 인터넷 사람 (Internet Person)”인데, 영상을 보았을 때 저는 ‘인터넷 사람’이라는 이 표현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2016년부터 제 맘대로 “공(식)적(인) 인터넷 지면”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대중음악과 관련된 글들을 쓰고 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저 자신의 자신감과는 별개로) 비평, 그보다는 ‘음악 글’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공적 인터넷 지면”에 글이 업로드될 때면 스스로에게 ‘대중음악비평가’라는 호칭을 붙여보고 거기에 부응하는 글을 쓰고자 하고 있습니다. 지난 6년 정도의 기간 동안 제가 쓴 대부분의 글은 제가 ‘인터넷에서 공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두 인터넷에만 올라왔고, 웬만하면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씨시레가와 비슷하게 거의 하루 종일을 인터넷과 워드프로세서, 혹은 모바일 화면들만 들여다보면서 지내고, 이제나저제나 자급자족과 비슷한 글들이 무언가 ‘창작 경력’ 비슷하게 되는 것에 신기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공식적인 인터넷 지면” 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공식적인 인터넷 공간”들 중에서는 블로그를 점유하거나 다른 웹 사이트를 돌아다니는 식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저는 거의 언제나 인터넷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대중음악비평가’라는 호칭이 ‘공적 지면’에 그나마 적절히 기입될 수 있는 만큼, 저는 ‘인터넷 사람’으로서의 저 자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하고자 합니다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유동하는 이 지면들, 떨리는 이 웹사이트들

그러는 한편, 저는 지금 무수하게 많은 ‘인터넷 사람들’을 대표한다거나 그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운 좋은 사례로서 작동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인터넷에 거주하며 각자의 비평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저 이전에도 무수히 존재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있을 테니까요. (다만 여기서는 주로 대중음악 글쓰기로 좁혀보고자 합니다.) 인터넷에서는 “기존의 제도로는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나날이 늘어 가고 있”2)는 것과 함께 “원래 사적 영역을 목적으로 개발된 인터넷 플랫폼들이 사라지고 있는 기존의 공적 영역을 어느 정도 대신하고 있”는 상황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온라인에 산발적으로 설치된 크고 작은 공적·공식적 웹 사이트와 플랫폼으로 주로 구성된 2000년대 이후의 대중음악 비평이 발생하는 공간은 권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가시적으로 작동하는 ‘제도’나 ‘장’이나 ‘씬’ 따위의 개념으로 지칭할 만큼 확실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나마의 이름값을 갖고 있는 여러 공간이나 인물 등이 일종의 단일한 캐릭터처럼 받아들여지거나, 애초에 각자가 각자의 존재대로 있는 편에 가깝지요.

 

거기서 공식성과 비공식성을 구분하는 미약한 기준은 단순히 인터넷상에서 오랫동안 잡지의 형태로 존재해온 웹 사이트들이나 포털 사이트나 음원 사이트 같은 비교적 공(식)적인 플랫폼3)에 글이 게시됐는지의 여부에 따라 갈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런 ‘공식적인’ 지면이 아니더라도 비공식적인 공간들에서 대중음악과 관련된 특정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양질의 글들 또한 지면 바깥에서 꾸준히 생산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도리어 영미권 대중음악 비평의 인터넷 시기를 대표할 ‘공식적인 매체’인 <피치포크 (Pitchfork)>의 리뷰 어법을 한국어로 체화한 글들은, 웹진보다도 블로그와 커뮤니티에서 더욱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어로 쓰인 특정한 칼럼이나 인터뷰 등의 번역문이나 매우 협소하거나 특정적인 지식정보들도 그럴 것이고요.

 

저 스스로가 운이 무척 좋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은 거기서부터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웹상에서 ‘비공식적으로’ 글을 썼던 기간이 ‘공식적으로’ 글을 쓰는 기간보다 훨씬 더 짧은 편이었으니까요. 제가 비평적인 욕망이나 자의식, 아니면 지식이나 목표나 책임감 (어쩌면 그러한 ‘자격조건’) 등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얼떨결에 글을 올렸던 [weiv]는 대표적이게 ‘공식적인’, 그러니까 ‘오랫동안 웹진의 형태로 존재해온’ 공간이었고, 저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러한 공간에 기입된 것만으로 비공식적인 공간에 올라와도 아무 차이 없을 글들은 ‘공(식)적’으로 분류되었던 것이지요.

 

상대적으로 좀 더 활동적이었던 2000년대에 그나마 ‘제도’에 준할 지면을 제공하거나 자처한 웹진들의 운영이 끝나거나 줄어든 후, 2010년대에는 이름값이나 원고료 등의 더 물리적인 안정성을 띤 음원 사이트 내의 매거진이 하나의 플랫폼인 동시에 또 다른 ‘공적 지면’이 된 것으로도 보입니다. ([weiv] 이후 저의 ‘공적 경력’은 대부분 멜론 매거진을 통해 이뤄지기도 했고요.) 결국에는 비교적 공식적인 온라인 공간에 글이 올라갔던 것뿐으로도, 제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만들어낸 자급자족적 무언가들’은 훨씬 더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경력’으로 이름 붙여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았을 때, 그 때에나 지금이나 제가 대중음악과 관련된 정보나 지식을 찾기 위해 방문한 인터넷상의 공간들에는 비공식적인 커뮤니티와 블로그에 실린 글들의 비중이 높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글들은 특정 대상과 취향에 대한 인상을 두서없는 단문으로 나열하는 것에서부터 나름대로의 가치를 생산하고자 구조가 갖춰진 정당화 작업을 할 수도 있고, 비평/평론 같은 단어들에 과민반응하며 지나친 무게를 달거나, 애초에 별 상관없다는 듯이 자급자족 식으로 쓰는 경우도 있겠지요. 인터넷 공간 특유의 유동성과 불안정성 덕에 기존의 의미 혹은 ‘제도’에서 비평적 글쓰기로 승인되지 못할 다양한 글들은 이 공간들에서 느슨히 포괄되어 존재할 수 있는 동시에, 바로 그 유동성과 불안정성 때문에 그나마 발 딛고 있을 지반을 만들기 위한 ‘플랫폼’의 필요와 그 지속성이 요청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상에 실린 대중음악 비평의 공식성과 비공식성을 공간 외적인 기준을 통해 깔끔히 나눌 수가 있을까요? 플랫폼이 되어주는 평면들은 얼마까지 수월하고 확실하게 인터넷 저편으로 그 윤곽선을 뻗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끊겼다 다시 형성되기를 거듭하는 이 균형들

제가 [weiv]에 처음으로 실었던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는 원래는 커뮤니티에서 ‘비공식적이자 공적으로’ 써냈던 것을 블로그에 ‘비공식적으로 사적이게’ 올렸다가, 다시금 약간 수정을 거쳐 ‘공식적이고 공적이게’ 업로드한 것으로, 저는 이 시리즈가 이를테면 무언가 적법한 ‘데뷔작’과 같은 위치에 있거나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저는 공적인 지면을 상정하고 글을 쓰면서 이것은 그냥 블로그에 올려도 별 상관없는 게 아닐까, 또한 블로그에 무언가를 마구잡이로 쓸 때는 이걸 좀만 다듬고 쳐내면 ‘공적 지면’에 올려도 괜찮지 않을까, 따위를 생각하곤 합니다. (어쩌다보니 석 자 멀쩡한 본명과 한글로 이뤄지지 않은 닉네임을 양쪽에서 사용하는 입장에서 그건 도저히 깔끔하게 분리할 수 없는 몇 개의 이름들 사이에서 글을 쓸지에 대한 문제 같기도 합니다.) 다양한 인터넷 공간에 올라오는 글들에 대한 불만인 동시에 칭찬으로 들릴 수 있을 “이런 게 왜 여기에?”라는 흔한 인상평은, 어쩌면 인터넷이므로 상당히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거기서부터 공식적 공간들에 틈새를 낼 수 있을 한편, 그렇기에 거꾸로 비공식적 공간과 인물들은 ‘여기’에서 다른 어딘가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공식성과 비공식성은 언제나 불안정하게 뒤섞이며, 개별적 대상들을 분류하고 확정짓는 고정값들을 생산하는 장치로서의 ‘제도’는 가뜩이나 확연히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더욱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와 동일하게, 글을 쓰는 ‘인터넷 사람’에게도 인터넷상에서 유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조건은 조금 더 단단한 ‘공식적 경력’과도 확실하게 분리할 수 없는 난감한 덩어리가 됩니다. 특히나 2010년대 이후의 인터넷에 거주한 채 글을 쓰는 것은 공식성과 비공식성을 더 이상 깔끔히 통제할 수 없는 이 끊임없는 불안정함 속에서, 그럴싸한 무언가를 만들어서 붙잡아보며 균형을 맞춰보고자 애쓰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위기’에 닥쳤다는 둥의 종언론으로 손쉽게 이어지는 ‘진단’이기보다는, 적어도 대중음악과 관련된 글쓰기의 영역에서 인터넷이라는 환경이자 조건의 다루기 까다로운 성질이 어느 곳이든 기초적인 전제가 되었다는 뜻으로 두고 싶습니다. 사실 이건 저의 활동 이전부터 진작에 나타나고 있던 거 같지만요.

 

이미 PC통신 시기의 동호회들부터 복수의 플랫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떠다니는 것이 당연해진 현재까지, 언제나 인터넷의 기본값이었던 이 조건들은 현재로 올수록 차차 가시화되었습니다. “직전 세대가 마련한 비평 플랫폼([weiv], izm, 가슴네트워크 등)을 통해 활동을 시작”한, 어떻게 보자면 초기 인터넷상의 비평적 활동들이 “개인의 취향, 주관, 선택 등을 비평의 최우선 기준이자 가치로 내세우며, 담론이 부재한 비평을 정면에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상황을 정당화하려” 했던 경향성이 지금까지도 공식·비공식과 공적·사적 지면들을 가리지 않고 주요하거나 유효하게 등장하는 것 또한 어쩌면 그 때문일 것입니다. 초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세대’ 이후에는 그럴싸하고 확연한 집단보다 각자도생식의 이름들로 온오프라인을 떠도는 이들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플랫폼이자 기반으로서의 제도의 기본 값이 유동적일 때, 대중음악에 대한 글쓰기가 그나마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개인의 자아와 그가 가까스로 굳혀놓은 취향 정도일 테니까요. (이는 물론 온라인상에서의 이른바 ‘취향 전시’ 같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부정적 서술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균형을 잡아보기기에 그 질량은 너무 가볍기만 합니다.

 

인터넷상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규모와 종류의 취향들을 만나보며 스스로를 꾸려낼 수 있는 이점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곧장 특정한 취향을 정체성과 너무나도 강하게 결부시켜 “의견이나 주장이 무언가를 향하는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자 결론이 되어버린”4) 상태에 머무른 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웹 사이트만으로 온라인 활동 범위를 제한”하거나 “정확히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쓰인 글들만 읽”5)는 결과로도 얼마든지 흘러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취향 ‘따위’에 얽매여있지 말라는 요청 혹은 압박이나, 고정적이고 그럴싸한 ‘담론’에 대한 크고 작은 열망 혹은 요구 또한 생겨나곤 합니다. 이것은 물론 글을 쓰고 있는 저 스스로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요.

 

 

...에 대해 대체 무슨 말을 할 것인가?6)

그렇게 ‘인터넷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불안정한 지면으로 이뤄진 이 공간들에 따른 불안감이 지속적으로 따라붙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그럼에도 ‘공적 경력’을 가진 저보다도 글쓰기를 실행해보고자 하지만 인터넷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양상과 그에 따른 공적 지면 혹은 ‘제도’의 허술함 혹은 부재를 마주하고 있는 인터넷 사람들에게 더욱 강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최근에 저는 모종의 단념 혹은 단절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터넷상에서 어떤 이유건 간에 글을 써보겠다는 욕망을 작동시켜본 인터넷 사람들이 어째서 이를 단념하게 되는 지를요. 그런 단절이 글을 쓰(려)는 사람의 내적인 이유보다도,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동시에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싶게 압도적인 인터넷 공간의 성질에서 발생했다면, 어떻게 그 제한 조건들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이게 작동시킬 수 있을까요? 애초부터 대안도 도피처도 가상세계도 아니었으며 오래 전에 물리적인 현실의 일부가 되어버렸음에도, 왜 인터넷은 아직까지도 너무 확실하게 불확정적일까요?

 

 

1) 이것에는 단순히 창작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재정적 불안정, 불안, 우울, 정신 건강, 가면 증후군, 번아웃, 인종 차별, 성 차별, 그리고 온라인 괴롭힘 등도 포함됩니다.

2) 윤아랑, 「네임드 유저의 수기」, 『한편』 2호, 2020, 민음사, 48쪽.

3) 여기서는 ‘플랫폼’이라는 개념은 느슨하게 잡았지만, “복수의 집단이 교류하는 디지털 인프라구조”라는 닉 서르닉(『플랫폼 자본주의』, 심성보 옮김, 킹콩북, 2020, 49쪽)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자 합니다. 이러한 플랫폼들은 그렇게 다양한 이용자들 사이에서 매개자로서 기능해 네트워크 효과를 유발하며, 거기에서 추출 가능한 데이터들을 점유합니다.

4) 지아 톨렌티노, 「인터넷 속의 ‘나’」, 『트릭 미러』, 노지양 옮김, 생각의 힘, 2021, 43쪽.

5) 지아 톨렌티노, 같은 글, 37쪽.

6) 소제목들은 사뮈엘 베케트, 『세계와 바지 / 장애의 화가들』, 김예령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6, 27쪽에서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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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영. 2016년부터 웹진 [weiv] 필진으로 활동을 시작해, 주로 인터넷 지면에서 대중음악에 대한 비평과 칼럼 등을 쓰고 있습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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